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기형도-10월

기록하다/북로그 2009. 10. 13. 02:28 |
1 
흩어진 그림자들, 모두 
한곳으로 모이는 
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 
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 
천천히 걸어 들어간다 
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 
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 
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 
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 
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 
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 

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 
갑자기 거칠어진다 
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 
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 
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 
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 
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,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 
희미한 언덕을 만든다, 빠짐없이 되살아나는 
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 

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 
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 
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 
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 
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 
오오,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 
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 
아무런 잘못도 없다 


2 
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 
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


출처:
기형도, 입 속의 검은 잎. 문학과 지성사


Posted by CoolEngineer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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