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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2010.11.18 입 속의 검은 잎 (3)
  2. 2009.10.12 기형도-10월 (2)
  3. 2009.03.03 Twilight, by Stephanie Meyer

입 속의 검은 잎

기억하다 2010.11.18 01:05 |


1998년 2월 9일, 학원사 서점. 
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, 을 사서 품에 꼭 안고 버스를 탔었다. 
당시 죽도록 짝사랑하고 있던 M의 호출기 인사 멘트에는
예의 자기 소개가 아닌 기형도의 오래된 서적, 그 마지막 연이 녹음돼 있었고,
그것 때문에 기형도의 시집을 꼭 손에 넣어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던 그 날. 
책을 사면 표지 안쪽에 날짜를 적어두는 버릇이 있었다. 
그래서 오늘 다시 펼쳐보니, 중학교 졸업을 코 앞에 뒀던 2월이었구나.

2010년 11월 17일, 우편함을 열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.
트위터에서 알게 된 분들 중 내가 참 좋아하는 후유소요님께서 보내주신 것. 
벚꽃색의 편지지에 차분한 글씨로 써내려간 편지와 함께, 기형도의 이 시집이 도착한 것. 
내 블로그의 위시리스트에서 보셨다고 쓰셨네. 아이구 이런. 

기형도에 처음 집착(!)하기 시작한 꼬꼬마 시절부터 지금까지,
워낙 좋아하는 시집이라 자주 끼고 다녔고, 
포항-서울-시애틀-데이토나비치-댈러스를 거쳐 
지금 사는 작은 동네에 이사오기 까지 무려 12년을 
수없이 이사도 같이 다닌 책이라, 내 오랜 책은 
너덜너덜해진 표지를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둔 낡은 시집인데- 
서울에서 갓 날아왔을 반짝이는 새 책이 도착하니 감회가 새롭다. 

두 책의 표지를 펼쳐 보았다. 
내가 샀던 책은 1997년 12월 26일에 나온 22쇄.
후유님이 보내주신 책은 2010년 8월 12일에 나온 44쇄. 

지은이는 기형도, 로 같지만 펴낸이의 이름은 바뀌었다. 
내가 샀던 책에는 이메일 주소 같은 게 없는데, 
새 책에는 문학과 지성사의 홈페이지 주소와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다.
 그랬지, 1997년만 하더라도 집집마다 인터넷이 깔려있진 않았었으니까.
처음으로 내 개인 이메일 주소를 만들었던 게 1998년 말이었던 것 같아. 
옛 책에는 '잘못된 책은 바꾸어드립니다- 지은이와 협의 하에 인지는 생략합니다' 라는 문구가, 
새 책에는 '양측의 서면 동의없는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' 라는 문구가 적혀있다. 
 
따끈한 차 한 잔을 홀짝거리며 똑같은 두 책을 비교해 책장을 넘겨보고, 
후유님의 편지를 되풀이해 읽어보면서 즐거운 초겨울밤을 보냈다.
그런데 내게 기형도는 온갖 우울함과 잿빛과 허무한 짝사랑을 다 버무린 그런 추억이었는데,
이젠 편지지에 수채화처럼 번져있던 벚꽃색이랑 함께 떠오를 것 같아. 하하.

:-) 후유님, 정말정말 고마워요- 헤헷. 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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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CoolEngineer
1 
흩어진 그림자들, 모두 
한곳으로 모이는 
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 
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 
천천히 걸어 들어간다 
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 
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 
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만져볼 뿐이다 
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 
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 
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 

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 
갑자기 거칠어진다 
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 
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 
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 
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 
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,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 
희미한 언덕을 만든다, 빠짐없이 되살아나는 
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 

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 
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 
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 
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 
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 
오오,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 
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 
아무런 잘못도 없다 


2 
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 
하얗고 딱딱한 옷을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


출처:
기형도, 입 속의 검은 잎. 문학과 지성사

그리고..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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